짙어진 가을 냄새에 이 와인과 이 영화를 곁들였습니다.🎬🍷
Oct. 2024 l Vol. 9
흔들리는 낙엽 속에서 그 와인 향이 느껴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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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결과에 따르면, 후각 신호는 감정과 기억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흔들리는 꽃잎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졌다며 사랑을 고백하던 노랫말도 과언이 아닌 셈이죠. 모스카토 다스티의 달달한 향에 20대 초반에 잠시 스쳐간 썸남이 문득 떠오르거나(모스카토는 작업주입니다) 구르는 낙엽 냄새에 쿰쿰한 레드 와인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고요. 인지하고 있지 않을 뿐, 생각보다 후각은 이토록 우리의 감정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점을 현명하게 이용하자면, 좋은 냄새를 곁에 두는 것으로 원하는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겠지요. 원스 어폰 어 와인, 이번 호에선 다른 감각보다도 후각에 특히나 집중해보기로 했습니다. 늘 마시던 와인에도 유독 코를 킁킁대고는, 후각 의식의 흐름대로 이리저리 기억을 더듬기도 하고 또 그렇게 찾아낸 좋은 기억들을 붙잡아두기도 하면서요. 확실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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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순이의 행복을 찾아서
도우 샤르도네 X <나디야의 행복한 베이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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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순이에게 왜 빵이 좋냐는 질문은 아마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래로 가장 부질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왜냐니요, 그냥 좋은 걸요. 길을 지나다가도 갓 구운 빵 냄새가 바람에 솔솔 실려 오면 콧구멍이 벌렁대고 누군가 서프라이즈로 선물한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 온 하루가 벅차오르는 저는 네, 꽤나 빵순이입니다. 한때는 밥보다 빵을 더 자주 먹던 시절이 있었고요. 거창한 빵지순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사 가는 곳마다 동네 빵집 사장님들이 늘 알아보던 단골 생활깨나 했습니다. 깜빠뉴와 치아바타 같은 식사빵의 신세계를 알았을 때는 정말 뒤통수를 ‘씨게' 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었고, 프랑스 파리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 하나를 꼽으라면 그림 같던 디저트 가게들을 꼽겠습니다. 저도 왜인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기분이 퍽 상한 날에도 빵이라면 조금 마음이 느슨해지곤 합니다.
그러니 빵 맛이 나는 와인이라면 게임 끝일 밖에요. ‘도우 샤르도네(Dough Chardonnay)’ 이야기입니다. 첫 맛은 시트러스와 열대과일 향으로 상큼하다가 끝 맛은 빵에 버터를 발라 구운 토스트 향이 싸악 맴돌더라고요. 오크 숙성을 한 화이트 와인에서는 흔히 버터과 토스트 향이 나긴 하지만, 이 와인은 ‘도우'라는 이름에 걸맞는 그 ‘빵내'가 유독 드라마틱하게 다가왔어요. 간혹 와인 맛을 표현할 때 ‘크리스피(Crispy)'하다고들 하는데, 바로 이 맛을 두고 하는 말일 거라 짐작했습니다. 그 고소한 피니시를 쉬이 놓아주지 않으려 몇 번이고 입을 쩝쩝대며 급히 부엌 선반을 뒤져 크래커를 곁들였죠. 그리고 뭐 보지, 곁들임 TV를 궁리하다 아주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그것도 빵을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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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야의 행복한 베이킹> 스틸컷. 고구마보단 감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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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넷플릭스를 뒤져 <나디야의 행복한 베이킹>을 틀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디야라는 사람이 행복하게 베이킹하는 리얼리티 시리즈인데요. 영국 베이킹 경연 대회 우승 경력이 있는 그녀는 직접 재료를 구하러 교외에 가기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그렇게 받은 영감을 베이킹으로 ‘행복하게’ 선보입니다. 영국 억양으로 ‘어-썸(Awesome)’과 ‘비우우우티풀(Beautiful)’, ‘앱쏠룻리(Absolutely)’ 등의 형용사와 부사를 남발하며 착착 만들어지는 디저트를 보고 있자면 뭐랄까요. 뭔가 포근하면서도 안락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못해 오밀조밀한 마음이 든달까요. 그렇게 빵 만드는 걸 보며 빵 맛이 나는 와인을 마셨습니다. 그 기분은 마치, 영국의 어느 시골 할머니 집 거실 소파에 앉아, 부엌 오븐에서 나는 파이 굽는 냄새를 맡으며 빈둥거리는, 뭐 그런 기분이랄까요(물론 신토불이 한국인입니다만). <감자의 행복한 오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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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야의 행복한 베이킹> 스틸컷. 식욕도 철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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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은 자고로 좋아하는 걸 가까이 두고 살아야 행복한 법인가봐요. 흥에 겨워 쓰고 보니 이번 레터는 어째 빵순이 소개서로 시작해 빵 찬양서로 마무리되는 것 같지만, 행간마다 저의 진심어린 애정이 뿜어져 나오는 걸 조금이나마 느끼셨다면 목표 달성입니다. 일상에 정신없이 쪼이기만 하느라 정작 좋아하는 것들을, 행여 저처럼 여러분 또한 놓치고 계시다면 이렇게나마 꼭 상기해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럴 땐 뭐든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고 가까이 곁에 두는 것만으로 효과가 있더라, 그것이 먹는 거든 보는 거든 아무튼 그걸로 맘이 푸근해지는 순간 만큼은 ‘앱쏠룻리 비우우우티풀’하지 않아요? 하고요. 살면서 딱히 이유도 없이 좋은 게 있나요? 그렇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고소하게 떠올려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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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발 담그고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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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한 낙엽이 지는 계절엔
<만추> X 기센 더 브라더스 말보로 피노 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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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피노 누아 같은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처음에는 피노 누아의 부드러우면서 섬세하고 도도하면서도 우아한 면을 동경했던 것 같습니다. 재배하기 까다로운 품종이라 태어날 때부터 귀한 대접을 받고 곱게 자라는 것도 부러운데, 와인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영롱한 루비빛의 겉모습도 아름다웠고요.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탄탄한 구조감에서는 자신만의 중심을 갖고 살아가는 현명한 사람의 기운도 느껴졌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복합적인 향과 맛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탓에 결국 긴 여운으로 남는 신비로운 마지막 모습까지도. 지금도 저는 피노 누아의 이런 면모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온갖 고급스러운 수식어를 가진 피노 누아는 의외로 (숙성이 오래 될수록) 쿰쿰한 부엽토 냄새를 품고 있습니다. 저는 이걸 두고 (빈틈은 아니지만 의외의 구수한 모습에) 인간미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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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피노 누아는 가을에 가장 당기는 와인입니다. 알록달록한 낙엽이 진 땅 위로 비가 내리고 난 후, 스멀스멀 올라오는 습기 가득한 숲속의 낙엽 썩은 흙냄새를 떠올리게 하거든요. 여름내 푸릇하고 청량한 화이트와인만 달고 살다가 축축한 낙엽 냄새의 피노 누아가 생각나는 날이면, 아 비로소 가을이 왔구나, 바뀐 계절을 실감합니다. 낙엽이 진다는 건 곧 겨울이 온다는 의미잖아요? 한 해의 끝을 목전에 두고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어 초조한 마음마저 다 품어줄 것 같은 포용력도, 가을에 피노 누아를 찾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그냥 피노 누아가 마시고 싶었던 저는 가을 냄새를 따라 '기센 더 브라더스 말보로 피노 누아(Giesen The Brothers Marlborough Pinot Noir)'를 오픈하고 '늦을 만(晩), 가을 추(秋)'의 이름마저 가을스러운 영화 <만추>를 꺼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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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추> 스틸컷. 여기서 스파클링 와인을 선택한 감독의 의도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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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는 살인죄로 7년째 수감 중인 애나(탕웨이)가 특별 휴가를 나와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에서 만난 훈(현빈)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겪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함께 한 피노 누아 와인 역시 배우들의 눈빛과 표정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존재감을 발휘했는데요. 영화 초반부, 와인은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보석금을 내고 3일 동안 잠시 밖을 나온 애나의 차갑고 어두운 얼굴처럼 옅은 타닌과 정향, 후추와 같은 날카롭고 떫은 맛이 감돌았는데, 그런 애나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훈의 플러팅처럼 은은하고 발랄한 베리향도 함께 머금고 있었습니다. 비가 자주 내리고 흐린 날들이 많은 가을의 시애틀 거리는 피노 누아의 젖은 낙엽 냄새를 더욱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다했고요. 타닌과 스파이시한 향이 날아가고 드디어 피노 누아다운 우아한 텍스처에 도달할 때 쯤, 시애틀의 하늘에는 안개가 걷히고, 애나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아주 옅은 미소가 번집니다. 물론 애나에게 주어진 3일이라는 시간은 금세 흘러갔고 제 와인도 어느덧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관객에게 긴 여운을 남긴 영화의 열린 결말마저 피노 누아를 닮은 영화에서, 저는 또 한번 취향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가을은 어느새 찾아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찰나 같은 계절이라는 걸 당분간 자주, 종종 의식적으로 상기하겠다고요. 앞으로도 피노 누아 같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만추가 지나가기 전까지 애정하는 피노 누아를 좀 더 마셔보겠다는 함의, 눈치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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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Late Autumn)
개봉ㅣ2011, 미국/대한민국
감독ㅣ김태용
출연ㅣ현빈(훈), 탕웨이(애나)
한줄평ㅣ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 속 우아한 피노 누아 같았던 탕웨이의 미모가 빛난 영화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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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 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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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콘텐츠, 마신 와인, 그외 발견한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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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레인 프라스카티 수페리어 리제르바(Philein Frascati Superriore Riserva)
로마의 어느 로컬 식당에서 만난 보석 같은 화이트 와인입니다. 식사를 주문하고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사장님이 직접 메뉴를 스윽 살피고는 이 와인을 추천하시더군요. 말바시아와 트레비아노 품종을 블렌딩한 화이트 와인인데요, 식사로 주문한 멜론과 프로슈토, 트러플 라구 파스타, 문어 구이 모두와 잘 어울려 모두를 와- 하고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 살구, 복숭아 계열의 산뜻한 과일향과 함께 화사한 꽃향, 적당한 산도가 어우러져 음식의 풍미를 살리는 제몫을 다했거든요. 손으로 직접 수확한 포도로 만든 유기농 와인을 이 가격에, 그것도 식당에서 마실 수 있다니. 이탈리아 사람들이 정말 부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와인을 계기로 줄곧 레드 와인파였던 저희 엄마가 화이트 와인 매력에 눈을 떴다는 TMI를 전합니다.
🇮🇹 이탈리아 🍇 말바시아, 트레비아노 💲25유로
🍷 샤또 물랑 드 라 브리단 생 줄리앙 2020(Chateau Moulin de la Bridane Saint-Julien)
보르도 와인의 특징이라면 포도 품종을 2가지 이상 블렌딩한 와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는 보르도 블렌딩 와인에 사용되는 단골 품종이고요. 폭탄주 좀 말아본 분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소맥'이든 '소백산맥주'든 그게 뭐든, 2가지 이상을 섞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황금 비율이겠죠. 그런 걸 보면 보르도엔 황금 비율에 재능 있는 천재들이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샤또 물랑 드 라 브리단은 스읍 하고 마실 때마다 와인 메이커가 이 황금 비율을 찾아내곤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가는 블렌딩 와인이었습니다. 은은한 베리향에 과하지 않은 오크 터치와 타닌이 조화롭게 입안에 굴러다니며 보르도 와인을 한껏 뽐냈는데요. 집중해서 찾아보면 나무껍질, 커피, 담뱃잎과 같은 스모키한 향도 느낄 수 있었지만 이 또한 결코 과하지 않았고요. 보르도 와인에서는 가성비 와인을 찾기 어려운 편인데, 오랜만에 하나 발견하니 이렇게나 말이 길어집니다.
🇫🇷 프랑스, 보르도, 생 줄리앙 🍇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쁘띠 베르도 💲 4만원대
감자
🥂샤또 보네 화이트 (Chateau Bonnet White)
프랑스 소비뇽 블랑은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과는 좀 다릅니다. 뉴질랜드의 것이 잔디향과 같은 풋내가 지배적이라면 프랑스의 것은 그보다 신선한 과실향을 더 끌어낸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저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을 너무도 사랑하는 1인이지만, 이것저것 음식에 곁들이기엔 프랑스 소비뇽 블랑이 더 만만할 때가 있더라고요. 샤또 보네 화이트는 소비뇽 블랑에 세미용을 살짝 곁들인 보르도 화이트 와인입니다. 풋풋한 풋사과 향으로 소비뇽 블랑의 존재감을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꽃, 레몬 그리고 세미용의 미네랄 캐릭터를 풍기며 탄탄한 구조미를 자랑하죠. 해산물과의 궁합이 좋다던 와인샵 사장님의 설명에 저는 간만에 감바스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고, 그것이 지난 주에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 프랑스, 보르도 🍇 소비뇽 블랑, 세미용 💲 3만원대
<흑백 요리사>는 다 좋은데 너무나 호로록 순삭입니다. 매주 업데이트되는 3편의 에피소드를 이번에도 단번에 봐버리고는 또 다시 넷플릭스를 유목하는 신세가 되었죠. 그러다 연관 콘텐츠에 <헬'S 키친>이라는 게 떠서 가볍게 맛만 살짝 보려 했는데, 온 주말을 저당 잡히고 말았지 뭐예요. <흑백 요리사>와는 다르게, 개인전보다는 팀전 대결 위주라는 점(여기서 말 그대로 지옥 같은 주방이 펼쳐집니다), 우리나라 방송에선 쉬이 볼 수 없는 저 세상 뒷담화, 그리고 프로그램 진행 내내 카리스마와 버럭을 넘나드는 고든 램지의 활약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맘에 드는 점 하나 더, 편집이 매우 빠른데요. 화장실 다녀오고 나면 탈락자가 한 명 더 생겨버리는 급박한 진행에 중간에 끊어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흑백 요리사>의 여운을 이어갈 후속작을 찾으신다면 추천입니다.
📺 넷플릭스 🔖 리얼리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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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와인 Once Upon a Wine
once_upon_a_wine@drinkinglet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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