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 이 영화X이 와인 조합 어때요?🎬🍷
Aug. 2024 l Vol. 5
그 시절 추억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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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시간을 돌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린 시절을 다룬 이야기라면 백발백중이죠. 영화 속 주인공의 감정선에 덩달아 이제는 까마득해진 첫사랑과 다시 조우하기도, 언젠가부터 굳은 살이 되어버린 상처를 되새겨보기도 하고요. 일상에 가려 있었을 뿐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기억이 이 때다 싶어 왈칵 뿜어져나올 때도 있죠. 그리운 얼굴들이 여전히 꽤 생생하게 스치기도 합니다. 회상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그리고 추억의 맛은 아마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맛보다도 미묘할 거예요. 벤자민 버튼의 시계처럼, 이번 주 각자의 영화와 와인을 페어링하던 감자와 여니고니의 시계는 잠시나마 거꾸로 갔습니다. 풋풋하고, 때로는 진하디진한 맛의 그 시절 그 때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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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빛나던 조각들은
<보이후드> X 텍스트북 카베르네 소비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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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자라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습니다. 영화 <보이후드>를 보는 저의 마음이요. 성장기를 다룬 영화는 여럿 있지만, 이 영화는 스케일 면에서 ‘어나더 레벨’입니다. 무려 12년 동안 같은 감독과 배우가 매년 만나 조금씩 촬영하며 그야말로 생생한 성장 드라마를 만들어냈죠. <보이후드>는 <비포 선라이즈>로 시작하는 일명 ‘비포 시리즈’의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맘먹고 진행한 장기 프로젝트인데요. 영화가 시작할 땐 어린 아이였던 주인공이 영화가 끝날 때쯤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으니, 정말로 한 사람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오롯이 관찰하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대’서사에 그래서 어떤 와인을 곁들이면 좋을지, 나름의 고민이 많았어요. 우선은 너무 가벼운 바디는 아웃. 탄닌 없이 매끈하기만 한 텍스처도 녹록치 않은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에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았죠. 조금은 거친 면도 있지만 결국엔 조화롭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레드 와인, 고심 끝에 ‘텍스트북 카베르네 소비뇽’을 골랐습니다. 믿고 보는 감독과 믿고 마시는 와인의 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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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오픈한 파워풀 레드 와인의 기세처럼, 메이슨과 사만다 남매의 어린 시절은 대체로 걸걸합니다. 엄마의 재혼으로 함께 살게 된 새 아빠는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죠. 이에 엄마 올리비아는 그와 이혼 후 새로운 남자와 또 한 번의 재혼을 하지만 그 또한 알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메이슨과 사만다는 엄마를 따라 도망치다시피 집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듯 쉽지 않은 일상에서도 다행히 남매의 모든 나날이 불행하지만은 않아요.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아빠와의 대화는 맘 맞는 찐친과의 수다처럼 소소하지만 유쾌하고, 취향껏 꿈을 키워나가는 과정에 설레기도 하고요. 어두운 기억, 그럼에도 이따금 빛나는 순간들에 기대어 메이슨과 사만다는 각자의 방식대로 성장해갑니다.
장장 2시간이 넘어가는 러닝 타임이건만, 한 사람의 삶을 진공 포장하듯 압축해 눌러놓은 것 같은 장면 장면에 시간도 와인도 우습게 동나고 말았습니다. 어엿한 대학생이 된 메이슨을 보니 이렇게 잘 자라준 게 얼마나 대견한지, 이모의 가슴은 한껏 웅장해졌죠. 좀 거칠고 스모키한 면이 있으면서도,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듯 마치 짜여진 퍼즐처럼 탄닌, 산도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카베르네 소비뇽과의 페어링도 성공적이고요. 벅찬 가슴과 취기에 부풀어오른 F력으로 이제는 까마득해져버린 나의 어린 시절도 한 번 되새겨봅니다. 사소하지만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은, 울적한 시기도 무사히 날 수 있게 했던 작지만 단단한 나의 조각들에 대하여. 어쩌면 우리는 어린 시절 차곡차곡 모아둔 이 빛나는 기억의 조각들로 지금의 하루를 버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좋은 영화와 좋은 와인은 아주 살짝 거들 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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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 (Boyhood)
개봉ㅣ2014, 미국
감독ㅣ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ㅣ엘라 콜트레인(메이슨), 에단 호크(아빠), 패트리샤 아퀘트(엄마), 로렐라이 링클레이터(사만다)
한줄평ㅣ잘 자라줘서 고마워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핀터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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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발 담그고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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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계절, 내가 좋아했던 그린 와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X 무랄라스 드 몬까오 화이트 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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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소비뇽 블랑과 맞먹는 상큼한 ‘그린 와인’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린 와인은 비뉴 베르드(Vinho Verde)를 해석한 또 다른 이름인데요. 포르투갈어로 비뉴는 와인, 베르드는 젊음으로 덜 익은 포도를 수확해 6개월 이내의 짧은 숙성을 거친 포르투갈 북서부 지역의 어린 와인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초록빛을 띄는 와인은 아니고요, 젊음에서 느껴지는 푸릇함이 자연스럽게 그린 와인이라는 애칭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대체로 풋과일 특유의 경쾌함과 톡톡 튀는 산미, 떫지만 가벼운 바디감, 아주 미세한 스파클링이 더해져 혹독한 여름, 입에 달고 살고 싶은 와인입니다. 여름과 그린 와인. 여기에서 지나칠 수 없는 영화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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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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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상큼미 터지는 그린 와인은 여느 하이틴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와 함께해도 무난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유독 예찬하는 이유는 열일곱, 오직 첫사랑에 대한 감정선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단순한 스토리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린 와인을 물처럼 마시더라’는 포르투갈을 여행한 사람들의 훌륭한(?) 목격담처럼, 그린 와인은 편안하고 쉽게, 아무 생각 없이 꿀떡꿀떡 마시고 싶은 와인이거든요. 복잡한 인물 관계도가 없고, 치열하게 결말을 추측해보지 않아도 괜찮은 작은 갈등마저, 현실판 첫사랑과 달리 복잡하지 않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 알바리뇨 100%로 만든 그린 와인, 무랄라스 드 몬까오 화이트 와인을 매칭했는데요. 초반에 훅 치고 올라오는 청사과향과 딱딱한 복숭아향, 입안에 0.5초 정도 머물다 사라지는 아주아주 미세한 버블은 션자이(천옌시)와 커징텅(가진동)의 풋풋한 열일곱 학창시절을 쏙 빼닮았습니다. 알 듯 말 듯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는 시점부터는 이내 풋내를 감추고 상큼한 시트러스 계열의 산미를 환하게 펼칩니다. 영화는 성인이 된 주인공들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공식을 따르며) 결말을 낼 때까지도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잃지 않는데, 이에 맞춰 와인의 경쾌한 산도도 잘 유지됐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아무런 의미 없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 사이 커징텅은 좋아했던 여자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만큼 성숙한 남자가 됐고, 그 사이 성난 여름의 열기도 다소 누그러진 것 같습니다.
이제 와 까마득한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영화 속 커징텅은 션자이에게 “그때 널 좋아했던 내가 좋아”라고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판 제 첫사랑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고요. 첫 이별부터 큰 교훈을 얻은 것으로 위로를 삼아 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조금씩 성숙해지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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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개봉ㅣ2012, 대만
장르ㅣ멜로/로맨스
감독 | 구파도
출연 | 가진동(커징텅), 천옌시(션자이)
한줄평ㅣ그 시절, 우리가 상상했던 모범적인 첫사랑의 장면들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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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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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콘텐츠, 마신 와인, 그외 발견한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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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니고니
🥂 이 본조르노 피아노 2022(I Buongiorno Fiano 2022)
본 조~르노! 3만원 소비가 하나도 아깝지 않은 와인을 만났습니다. “이 가격에?”라는 말이 입밖으로 터져 나오게 만든 와인은 ‘이 본조르노 피아노’입니다. 이탈리아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의 오너가 직접 운영하는 와이너리에서 피아노(Fiano)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인데요. 화사한 백합 향에 잘 익은 복숭아, 망고, 멜론, 망고스틴 등 프루티한 맛을 풍성하게 담고 있습니다. 은근한 미네랄도 따라오고요. 입안에서 매끈하면서도 둥글둥글하게 움직이는 질감에도 기분이 좋아져 룰루랄라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저는 과일 값이 치솟는 겨울, 과일 대용으로 마셔볼 요량입니다.
🇮🇹이탈리아 살렌토 🍇피아노 💲3만원대
🧀 알미토 체리페퍼 크림치즈
입맛이 없을 때, 배는 부르지만 가벼운 안줏거리는 필요할 때. 간편하고도 가성비 철철 넘치는 알미토 체리페퍼 크림치즈를 '강추'합니다. 먹음직스러운 체리 모양을 한 피망(체리페퍼) 안에 꾸덕한 크림치즈를 꾹꾹 채워 카놀라유에 담고 있는데, 사계절 내내 쟁여두고 먹고 싶은 맛입니다. 살짝 매콤한 것이 느끼함은 줄이고 살짝쿵 스치는 상큼함이 입맛을 돋웁니다. 빵에 슥슥 발라먹어도 좋고, 크래커 위에 가볍게 얹어 먹어도 좋은데, 입이 짧은 편이라면 식사 대용으로도 노려볼만 합니다. 저는 이 본조르노 피아노 와인과 함께 처음 접하게 됐는데요, 그러고 보면 이날 저는 운이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 그리스 💲7천원대
🎬 보희와 녹양
결핍에 집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남들에게는 있지만 나에게는 없는 것, 남보다 부족한 것, 남들과 다른 것,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 따위에 전전긍긍하며 스스로 속을 태웠죠. 우리 모두 완전할 수 없는 우주 속 먼지 같은 존재인데 말이에요. 꽤 오랜 시간 끙끙거리던 저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핍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보희와 녹양>은 중학생 보희(안지호)가 어릴 적 가족을 두고 떠난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단짝 친구 녹양(김주아)이 옆에서 보희를 돕고요. 사실 두 사람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운명 같은 친구인데요. 겉으로는 털털하고 강해보이는 녹양에게도 자신을 낳다가 하늘로 떠난 엄마의 부재가 결핍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주하고 싶었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과 맞닥뜨리며 크게 마음을 앓습니다. 고통 없는 성장은 없는 법인가 봐요. 저는 남들보다 조금 이른 두 사람의 성장통을 지켜보며 전하지 못할 쪽지를 남깁니다. 우리 모두는 완전할 수 없기에 서로가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며 살고 있다고요.
감자
소신 고백합니다. 저, 최근 와인에 소홀했어요. 위경련을 시작으로 여름 냉방병에 조금씩 쇠약해져가는 몸둥이 이슈로 울며 겨자먹기로 당분간 금주를 감행했거든요. 스테이크과 카이센동을 눈앞에 두고도 와인을 마실 수 없는 가혹한 실정에 뭐라도 대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회사 동료가 선물해준 화이트 발사믹에 눈을 돌렸는데요. 최화정 유튜브에도 소개됐다는 그것, 사실 별 기대 없이 얼음 동동 띄운 물에 타 먹었는데 웬걸? 이거 뭔데 왜 이렇게 맛있어요? 홍초보다 우아하면서 애사비의 쿰쿰함은 없는 고급진 맛. 좀 많이 시큼한 화이트 와인이라 셀프 최면을 걸며 몇 병째 재구매 중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화이트 와인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2만원대
<리틀 포레스트> 같은 시골물(?!)을 너무도 사랑하는 저의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보물 같은 채널을 하나 캤습니다. 70년 된 시골집을 개조해 손수 공간을 다듬으며 사는 30대 도시 남자, 하고재민님의 채널입니다. '배가 고파서 왔다'며 김태리가 영화 속에서 만들어 먹던 건강식 코스처럼, 시골집에서 국수를 말아 먹고 부침개를 부쳐 먹고. 팍팍한 도시에서 늘 허기진 직장인에게는 그저 부러운 현실판 리틀 포레스트입니다. 매 영상 등장하는 먹는 장면도 어찌나 맛깔나는지요. 풀벌레 소리 나는 집에 사방이 초록인 시골 풍경을 보고 있으면 머릿속 생각들이 잠잠해지는 것 같아요. 조만간 어떻게, 촌캉스라도 가야 하나 심히 고민 중입니다.
저명한 과학기자가 쓴 과학서인데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라는 철학적 부제가 흥미로워 읽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위기에 봉착한 저자는 우연히 알게 된 19세기 어느 과학자의 삶에 뭔가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하지만 강력한 촉에 기대 그 과학자의 삶을 하나하나 추적하기 시작하죠. 혼돈 투성이 세상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며 그 안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찾으려던 광기어린 과학자, 그리고 그 과학자의 삶에서 의미를 얻고자 하는 저자. 그리고 저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뭐라도 답을 얻고 싶은 뼛속 문과인입니다. 과학에 관한 얘기긴 하지만 담담하게 쓰여진 자서전이나 회고록과 같아서, 읽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아요(다행). 이제 중간 정도 읽었는데, 이 혼돈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해답을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구독자님들에 한해 비밀스럽게 풀어놓을게요.
🙎🏼♀️룰루 밀러 🔖자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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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와인 Once Upon a Wine
once_upon_a_wine@drinkinglet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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