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 소비뇽 블랑 데이를 아시나요?
May 2025 l Vol. 23
소비뇽 블랑 같았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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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5월 첫째 주 금요일이 ‘국제 소비뇽 블랑 데이(International Sauvignon Blanc Day)’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뉴질랜드 말보로에서 시작된 날로, 이제 제법 전 세계 곳곳에서도 알아주는 정식 기념일처럼 되어가나 보더군요. 3.3데이에 삼겹살을 먹는다든가 블랙 데이에 짜장면을 찾아 먹는 편은 아니지만 때마침 연휴를 앞둔 황금 불금, 이 날을 애써 기념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어때, 나 안 같지?’라며 숨어서 코와 혀를 속이는 세계 곳곳 다양한 소비뇽 블랑들도 존재하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뻔하지만 확실한 방향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소비뇽 블랑 하면 떠올리는 그, 풀내 한가득 뉴질랜드 말보로의 소비뇽 블랑으로요. 5월의 첫 원스 어폰 어 와인, 틀림 없이 만족스러울 와인과 영화를 곁에 두고서 풋풋한 소비뇽 블랑 데이를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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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레몬, 여름, 첫사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X 킴 크로포드 말보로 소비뇽 블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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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돌아오는 기념일의 의식처럼, 여름을 앞둔 저는 매년 어김없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꺼내 봅니다. 한해 여름을 맞는 제 나름의 루틴이기도 하거니와, 보면 볼수록 더 좋아지는 예술 작품을 볼 때와 같은 경이로움이 여전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독보적인 색감과 이탈리아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평온한 무드, 장면 장면 박제된 티모시 샬라메의 더없는 리즈 시절. 그치만 정말로 좋을 땐 정작 좋은 이유를 뾰족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영화가 왜 좋냐 물으신다면 저 또한 잘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 언어로 ‘느좋’이라는 것밖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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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컷. 이보다 여름일 수 없는 정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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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 최애 영화를 볼 때면 나름 와인 페어링에 꽤 신경을 쓰게 되는데요. 매년 라벨은 달랐지만, 이 영화에 곁들인 품종은 어김없이 소비뇽 블랑이었습니다.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 그리고 주인공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의 가족이 사는 이탈리아 집 초록 정원에 가득한 레몬 나무들을 보는 순간, 이보다 소비뇽 블랑일 순 없으니까요. 풋내 나는 잔디 같은 와인을 마시며 마치 레몬향이 나는 듯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비로소 저는 다가오는 여름을 실감하곤 합니다. 올해는 ‘킴 크로포드 소비뇽 블랑’으로 골랐는데요. 청사과와 레몬, 자몽으로 시작해 파인애플과 같은 열대과일 풍미로 마무리되는, 뉴질랜드 말보로 소비뇽 블랑의 정석에 가까운 와인입니다. 시작은 가벼우나 끝이 마냥 가볍지 않고, 다양한 풍미가 공존하면서도 결코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는, 명작은 늘 단순하지만 힘이 있습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또한 플롯은 매우 단순합니다. 어느 여름날 엘리오의 집에 아버지의 여름 손님, 올리버(아미 해머)가 찾아오며 이야기는 시작되죠. 6주간의 함께 지내게 된 엘리오와 올리버는 어느새 서로에게 여름보다도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는 사건 없이도 두 인물의 터질 듯 터지지 않는 미묘한 감정만으로 온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다는 게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참 대단하다고 느끼는 포인트인데요. 볼 때마다 들뜨고 볼 때마다 무너지는 저라는 관객에게 남은 건 이번에도 잔디, 레몬 그리고 뜨겁다 못해 얼얼한 첫사랑의 감정이 뒤섞인 여름의 낌새입니다. 물론 홀짝홀짝 넘어가는 소비뇽 블랑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겠지요. 아직은 봄, 얼큰한 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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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컷. 물풍선처럼 터질 듯 터지지 않는 감정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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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도 여운이 가시질 않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OST 모음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려는데(물론 식세기가 있습니다) 문득 나에게도 저런 열렬한 감정이 있었나 싶은 거예요. 이제는 (정말로) 까마득해져버린 첫사랑이란 것, 곰곰히 되새겨보니 풋풋은 했고 꽤 뜨겁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아름답지는 못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만 저에게도 한 때 잔디, 레몬향 가득한 감정들이 있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추억할 뿐입니다. 마치 소비뇽 블랑과 같았던 시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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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개봉ㅣ2018, 이탈리아/프랑스/브라질/미국
장르 | 드라마
감독 | 루카 구아다니노
출연ㅣ티모시 샬라메(엘리오), 아미 해머(올리버)
한줄평ㅣ영상미, OST, 연기, 배우, 모든 면에서 소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 여름 영화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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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발 담그고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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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만 취하면 인생은 축제
<어나더 라운드> X 배비치 블랙 라벨 소비뇽 블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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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첫째 주 금요일, 소비뇽 블랑 데이. 비로소 소비뇽 블랑을 마시기 좋은 계절이 시작됨을 알리는 날을 맞이했습니다(여러분, 분명 와인의 세계에도 절기가 있습니다). 저는 소비뇽 블랑 데이를 핑계로 한 달 전부터 한 박스나 쟁여둔 배비치 블랙 라벨 말보로 소비뇽 블랑과 함께 가장 현실적이고 저다운 방법으로 불금을 즐기기로 했는데요. 선선한 바람이 살랑거리는 날씨, 상큼 프레시한 소비뇽 블랑 한 병, 그리고 얼큰하게 취해 다음 날 늘어지게 자도 괜찮은 금요일 저녁. 이 기분을 한껏 끌어올려줄 것 같은 영화, ‘한 잔 더!’를 뜻하는 <어나더 라운드(Another round)>가 채택됐습니다. ‘혈중 알코올 농도 0.05%, 약간만 취하면 인생은 축제’라고 포스터에 적힌 문구에 완전히 영업당했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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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흥미로운 실험이 시작되는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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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의 냄새가 폴폴 풍기는 이야기는 코펜하겐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역사, 체육, 음악, 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사이자 친구인 마틴과 토미, 피터, 니콜라이가 모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각자 사정은 다르지만 40대에 진입한 이들의 일상은 열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계적이고 반복적이며 무기력한 모습이죠. 특히 마틴은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대놓고 무능한 교사로 낙인 찍힌 데다 아내와 아이들과의 사이도 데면데면합니다. 시종일관 어두운 기운이 뻗치는 그런 그가 걱정스러웠던 친구들은 흥미로운 이론 하나를 던지는데요. 노르웨이의 철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핀 스코르데루가 실험한 바에 따르면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 더 느긋해지고 침착해지며, 창의적이고 대담해진다는 거예요. 맛있는 음식에 어울리는 샴페인과 보드카, 레드 와인이 줄줄이 나와도 물만 벌컥벌컥 마시던 마틴은 일상에 변화가 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친구들의 조언에 크게 결심한 듯 입안에 술을 시원하게 털어 넣습니다. 그리고 네 사람은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실험에 돌입합니다. 그렇게 이들은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기 위해 아침부터 학교에서까지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감정의 변화와 그에 따른 행동의 변화를 추적하는데요. 어라? 굳어있던 마틴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느슨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거 아시죠? 사람마다 알코올 분해 능력이 다른 만큼 그 ‘약간의 취기’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알코올의 양도 다르다는 거요. 이론상으론 와인 한 두잔이면 인간의 일상 생활에 더 활기를 준다는데(제겐 택도 없는 양이지만), 그게 드라마틱한 변화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네 사람은 점점 알코올 농도를 높이며 실험에 더 적극적으로 임합니다. 저 또한 이들의 흥미로운 실험에 속도를 맞추며 배비치 블랙 라벨 소비뇽 블랑을 신나게 주입했고요. 시트러스향이 짜릿하게 입안을 감싸고 청사과, 파인애플과 같은 산도 높은 과실향의 존재감도 상당한데, 짭조름한 미네랄이 입에 착착 감기는 것이 밝고 유쾌한 영화의 텐션에 역시나 잘 어울렸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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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알고보니 덴마크는 주류 소비 강국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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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들의 실험 결과는 어땠을지 짐작이 되시나요? 저는 스포 방지를 위해 딱 와인 반 병을 비우고 점차 속도를 줄이게 됐다는 단서만 남기겠습니다. 얼마 전 만취 상태에 도달해 크게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도 있지만, ‘한 잔 더’의 결말은 ‘만취’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요. 사실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원제는 ‘Drunk(만취)’입니다. 하지만 “술은 정말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는 영화의 질문에 저는 ‘Yes’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절제된 삶은 인간의 숨통을 조일 수밖에 없거든요. 적당한 취기, 적당한 실수, 적당한 틈은 인간에게 필요한 불균형이죠. 저는 술의 힘을 빌려 불균형 속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끼고 다시 균형을 유지할 이유를 찾습니다. 알딸딸한 취기에 그날 걱정과 고민을 털어내는 날들도 많고요. 무엇보다 기분 좋을 때 마시면 저를 극락으로 보내주는 주님과 저는 헤어질 마음이 1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직 3병이나 남아 있는 배비치 블랙 라벨 소비뇽 블랑을 보며 흡족해하고 있는 걸요. 소비뇽 블랑이 맛있는 지금 이 계절을 허투로 낭비해선 안 될 일이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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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라운드
개봉ㅣ2022, 덴마크
감독 | 토마스 빈터베르그
출연ㅣ매즈 미켈슨, 토머스 보라센, 라르스 란데
장르ㅣ드라마
한줄평ㅣ호기심 넘치는 주당에겐 위험한 영화일지도?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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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 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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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콘텐츠, 마신 와인, 그외 발견한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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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하면 5,990원, 세일을 안 해도 6,990원짜리인 와인에게 걸었던 기대치가 너무 낮았던 걸까요? 이 와인은 분명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은 아닙니다. 하지만 엥겔지수에서 음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술꾼에게는 매일 마셔도, 마시고 남겨도, 요리할 때 팍팍 써도 부담없는 가격은 고마운 일입니다. 산도가 제법인 체리와 자두, 블랙베리, 약간의 흙내음과 오크향이 퍼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부드러워져서 저는 다음 날 남은 와인이 더 맛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디감이 너무 약하다며 와인에 물 탄 것 같다고 하던데, 그래서 저도 한 박스 쟁여놓고 물처럼 매일 마시고 있습니다.
🇨🇱 칠레 🍇 까베르네 소비뇽 💲 1만원 이하
여러분, 진짜 배달의 민족은 중국인이었습니다. 얼마 전 상하이에서 도로를 누비는 수많은 배달 오토바이를 보고 깨달은 사실입니다. 대륙의 배달 스케일에 감탄한 저는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영화 <역행인생>을 찾아봤는데요. 요즘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중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잘 나가는 IT 기업에서 프로그램 개발 팀장을 맡고 있는 가오 지레이. 40대, 외벌이, 중학생 딸과 노후 준비가 되지 않은 부모님 봉양이라는 영화 속 설정도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레이는 갑자기 회사에서 해고됐는데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그의 의지와는 달리 취업난 속 40대 고스펙의 고연봉자가 설 자리는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와중에 주택 대출금에 아버지 병원비, 딸 아이의 교육비는 그의 숨통을 조이고요. 유일하게 그를 받아준 곳은 배달 플랫폼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새롭게 시작한 배달 라이더로서의 치열하고 고된 삶을 보여줍니다. 솔직히 말하면 갑갑한 현실을 콕콕 찌르는 영화라 보다 보면 내 인생도 막막하고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감독이 심어놓은 작은 희망의 씨앗을 여러분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 중국 🎬 감독 徐峥(쉬쩡)
서래마을 근처에 살며 틈날 때마다 맛집을 캐곤 합니다. 오며 가며 참 예쁜 레스토랑이다 싶었다가, 얼마 전 친구의 권유로 드디어 프랑스 가정식 레스토랑 '마담 미미'에 입성하게 됐죠. 참을 수 없어 결론부터 뱉으면 두 번 가세요, 세 번 가세요. 프랑스인 사장님의 정성스런 응대에 일단 기분이 좋아지고(한국말 저보다 잘하십니다), 거를 타선 없는 메뉴 하나 하나에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스테이크, 문어 요리 모두 다 훌륭했는데 그중 저의 최애 메뉴는 어니언 수프. 지금껏 먹은 어니언 수프는 진정한 어니언 수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살면서 작은 걸로 가성비 좋게 뿌듯해지는 일들이 몇 있는데, 저만의 맛집 리스트가 하나 추가되는 일 또한 그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부디 너무 소문 내진 마시고요, 소개팅이나 청모, 뭐 그런 특별한 날이라면 더욱이나 강력 추천 드립니다. 📍 서울 서래로5길 34 1층
📚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작가의 신간, 고민 없이 구매했습니다. 그동안 김영하 작가의 글에서 볼 수 없었던 어릴 적 학창시절 이야기, 가족사 등 개인적인 내용들이 다분히 담긴 자전적 에세이인 만큼 책장을 넘길 수록 작가와 조금 더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동시에,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철학적이지만 실제적인 질문에 꼬꼬무 식으로 저만의 답을 던지며 꽤나 생산적인(!) 5월의 연휴를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역시나 답은 찾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 또 다른 책에서 읽은 '인생은 답 없는 질문으로부터 변화한다'는 문장을 믿고 열심히 나름의 사유 중이죠. 고로 이런 답 없는 질문들을 자꾸만 상기하는 책은 좋은 책이고, 와중에 문장은 간결하며 울림은 깊습니다. 👦🏻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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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와인 Once Upon a Wine
once_upon_a_wine@drinkinglet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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