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다 할 스토리가 없다면 없는 로드 무비이건만, (식상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프랑스 소도시를 배경으로 시시콜콜 오가는 대화들, 프랑스 요리와 와인의 존재감만으로 지루함 없이 충만한 러닝 타임이 이어졌습니다. 급기야 참지 못한(!) 저는 부엌 한 구석 와인 셀러(라기보다는 선반에 가까운)에서 프랑스 론 지방의 ‘라 바스티드 세인트 도미니크 꼬뜨 드 론 루즈’를 골랐습니다. 시라 특유의 진한 과실향, 진득한 라즈베리향과 다소 걸걸한 탄닌, 끝 맛에는 묘하게도 박하향이 살짝 감도는 묘한 매력이 있는 와인. 너무 강한 게 아닌가, 했던 첫 인상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럽고 섬세한 매력을 뿜는다는 점에서 영화 속 자크와 닮았다는 짜맞추기식 논리를 뒤로 하고도, 사실 프랑스 와인을 홀짝이며 영화 속 프랑스 풍경과 문화를 보는 일이 마냥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영화의 속도에 맞게 천천히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냉장고에 있던 디저트까지 먹다 보니 한 끼에 2~3시간도 먹는다는 프랑스인들에게 공감이 가기도 하더군요. 녹차 롤케이크와 와인의 박하향이 만나 '시원쌉싸름' 하모니에 다다를 때까지, 저는 간만에 때우지 않고 즐겼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함께 신나게 떠들 사람이 없었다는 것. 뼛속까지 I인 극내향인도 이럴 땐 가끔 맘 맞는 사람과 도란도란 와인을 나눠 마시며 이 얘기 저 얘기 맘껏 수다를 떨고 싶어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마시면 좋겠다 싶어 집에 쟁여둔 와인, 그리고 한 번은 해봐야지 하며 저장해둔 유튜브 레시피들을 괜시리 꺼내보는 걸 보면요. 당장이라도 약속을 잡아야 할까 싶지만, 이 또한 (이러다 금방 나자빠지는 I의 경험상) 너무 서두르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이 (작고 소중한) 외향성 에너지를 원기옥처럼 모으고 모아, 정말로 좋은 자리에서 제대로 발산하길 바랄 뿐이죠. 좋은 와인과 영화, 그리고 사람은 적어도 그때까진 도망 가지 않고 저를 기다려줄 거라 믿으면서요.

감자

미국 역대 천재 흑인 여성 수학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를 보고 감명을 받으신 적이 있다면, 이 영화 또한 좋아하실 거라 확신합니다. <6999 중앙우편대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해외에 파병된 미 육군 유일의 흑인 여성 대대가 겪는 (심지어 군에서도 만연했던) 인종 차별을 딛고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히든 피겨스>와 마찬가지로, 실화 베이스의 영화인 만큼 몰입감이 점점 눈덩이처럼 증폭되는 바람에 간만에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호로록 주행해버리고 말았죠. 안타까움, 답답함, 화남으로 시작한 감정이 결국엔 시원함, 감동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고 여느 실화 바탕 영화와 같이 끝무렵에 실제 인물들의 사진이 등장할 땐 TV 앞에서 저와 남편은 서로 부둥켜안고 박수를 쳤습니다(왜?!). 아무튼 그만큼 최근 재밌게 봤던 영화라 원스 독자님들께도 꼭 소개하고 싶었고요! <히든 피겨스>도 <6888 중앙우편대대>도 둘 다 뭐가 뭔지 생소하시다면, 하나 하나 차근차근 시작해보시면 좋겠습니다.

🎥 넷플릭스 🔖 2024, 미국,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