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완벽한 음주 핑계 영화를 보며.
June 2025 l Vol. 26
이걸 정말 와인 없이 본다고?👀🥂
|
|
|
와인이 마시고 싶을 때 적당한 핑계를 찾는 일이란 음주인에게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날이 좋아서, 비가 와서, 오늘따라 꿀꿀해서, 배는 안 고픈데 그렇다고 굶기엔 허전하니까, 주말이 오니까, 주말이 가니까. 세상엔 이렇게나 마셔야 할 이유가 넘쳐나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인정합니다. 핑계는 핑계일 뿐, 그냥 마시고 싶을 때가 잦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와중에 솔직히, 정말로 와인이 필요한 순간도 분명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스테이크나 연어회를 먹을 때, 그리고 오늘 소개할 이런 영화들을 볼 때처럼요. 아니, 어떻게 이걸 와인 없이 밍밍하게 볼 수가 있죠? 이번 호 원스 어폰 어 와인, 에디터 감자와 여니고니의 ‘와인벨’ 영화를 꼽아봤습니다.
P.S. 독자 여러분, 원스 어폰 어 와인은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레터 연재를 마감합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해드리게 되어 죄송한 맘, 그리고 지금껏 원스 어폰 어 와인을 지켜봐주신 여러분께 감사한 맘입니다. 본격 작별 인사는 SIDE 코너에 이어서 남기겠습니다.🍷
|
|
|
한 모금의 샤도네이가 데려간 곳
<와인 컨트리> X 하켄 샤도네이 |
|
|
이날도 역시나 저는 와인을 마실 핑계를 찾아 기웃대고 있었습니다. 버터리한 오크향이 낭낭한, 약간은 기름진, 그러나 산뜻함을 잃지 않는 캘리포니아 샤도네이가 간절했거든요. 만화 <신의 물방울>을 보면 곧잘 이런 장면이 등장하곤 하는데요. 절대 미각을 가진 주인공이 어떤 와인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 순간 어느새 배경이 푸른 포도밭 풍경으로 와락 바뀌는 장면들. 저는 이날 유독 버터리한 샤도네이가 마시고 싶었고, <신의 물방울>처럼 이 와인 한 모금이 저를 어떤 식으로든 포도밭 언덕 위로 데려다줬으면 했습니다. 진지하게, 가끔 저만의 지니(genie)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하는 편입니다.
|
|
|
영화 <와인 컨트리> 스틸컷. 내가 꿈꾸는 그 포도밭 언덕 위에서 |
|
|
하지만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절대 미각의 소유자가 아닌 데다 저를 위해 일해줄 지니도 없으니, 나름의 보조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영화 <와인 컨트리>를 보기로 한 이유입니다.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사는데 이 영화를 볼 때만큼은 그 생각이 164배 정도는 더 증폭되는 것 같습니다. 따수운 햇살, 푸릇푸릇 포도밭, 온 마을에 보석처럼 콕콕 박힌 와이너리들. 딱 제가 꿈꾸는 와인 산지의 완벽한 모습이 러닝 타임 내내 배경으로 이어지거든요. 와인은 캘리포니아산 ‘하켄 샤도네이(Harken Chadonnay)’로 골랐는데, 오크향이 간절한 오늘 같은 날 아주 제격일 것 같았습니다. 와인병 뒷편에 적힌 문구가 맘에 퍽 들기도 했고요.
‘어떤 포인트에서 누군가 이런 훌륭한 토스트향과 버터리한 피니시가 촌스럽다로 판단했는데,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다시 되살렸다. (At some point, someone decided that those great toasty notes and buttery finish went out of style. We think that’s crazy. So we brought it back.)’
그렇게 저는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Napa Valley)의 한 가운데서, 캘리포니아산 샤도네이를 홀짝였습니다.
|
|
|
영화 <와인 컨트리> 스틸컷.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여자 여섯, 남자 하나 |
|
|
영화 속 주인공들도 쉴새 없이 와인을 마셔댔습니다(짜-안). 50번째 생일을 맞은 레베카를 위한 특별한 여행을 계획한 애비는 미국 최대의 와인 산지, 나파 밸리에서의 휴가 계획을 세워 친구들을 초대합니다. 그렇게 모인 6명의 친구들은 와이너리 투어를 하며 맘껏 마시고 먹는데요. 뭐가 문제일까 싶지만, 하나도 둘도 아닌 여섯 명의 여자가 모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자신이 애써 세운 계획에 잘 따라주지 않는 친구들이 야속한 애비와 그런 애비를 비웃는 레베카, 여행에서도 일을 놓지 못하는 워커홀릭 캐서린, 유방암에 걸렸을지 몰라 불안해하는 나오미, 와중에 집에 가고 싶은 제니, 여행지에서 만난 로맨스에 한껏 설렜다가 실망만 잔뜩 떠안은 밸까지. 함께 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삐걱대던 이들의 여정은 가감 없고 거침 없는 말들과 함께 이어지는데요. 수다와 취기, 고구마와 사이다가 마구 뒤섞인, 미국 중년 여성들의 시시콜콜 우정 여행기를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와인이 고프고 여행이 마려워집니다. 일단은 눈앞에 와인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
|
|
영화 <와인 컨트리> 스틸컷. 인생 뭐 있냐, 짠이나 하는 거지 |
|
|
물론 언젠가 여행도 꿈꾸고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저와 여니고니님은 10년 후를 기약하며 ‘와인 여행 모금’을 하기로 했거든요. 10년 후 쯤이면, <와인 컨트리> 속 언니(!)들의 연배쯤에 얼추 가까워졌을 때쯤 여기저기 와이너리들을 전전하며 이들과 같은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저 내키는대로 마시고 먹고 걸으며 양껏 수다 한 번 떨어볼 요량으로, 일명 ‘원스 계’를 시작해보기로요. 그러니까 한 모금의 샤도네이가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지 말입니다. 자고로 음주의 묘미는 고삐를 반쯤 풀어헤치는 것이고, 그 느슨한 바람에 나비 효과 비슷한 것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
|
|
와인 컨트리 (Wine Country)
개봉ㅣ2019, 미국
장르 | 코미디
감독 | 에이미 포엘러
출연ㅣ에이미 포엘러, 마야 루돌프, 아나 가스테이어
한줄평ㅣ살다가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향긋한 일탈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
|
|
WRITTEN BY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발 담그고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
|
|
행복한 순간엔 언제나 와인이 있었지
<와인을 딸 시간> X 샤푸티에 크로즈 에르미타쥬 구에 반 |
|
|
돌이켜보면 혼자 무언가를 보면서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드라마 <혼술남녀>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가 방영된 2016년, 그때부터 무언가를 보면서 먹고 마시는 형태의 혼술에 푹 빠졌으니 저는 벌써 10년차 프로 혼술러입니다. 그렇게 혼술의 세계를 파고드는 동안 저는 ‘오늘 뭐 먹지?’ 만큼 ‘오늘 뭐 마시지?’ 그리고 ‘오늘 뭐 보지?’를 고민하며 최상의 삼합을 찾는 데에 나름 진지했습니다. 음식마다 어울리는 주종이 있듯, 무언가를 보면서 마시는 데에도 정말 궁합이 있구나 싶은 날들이 하루이틀이 아니었거든요. 눅눅하고 어두운 스토리의 영화를 보며 산뜻한 화이트와인을 마시다가 반도 비우지 못한 날도 있었는데, 첫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 꼭 맞았던 풋내 가득한 그린 와인은 끝까지 꿀떡꿀떡 잘도 들어갔죠.
딱히 정해진 기준은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의 스토리, 색감, 분위기, 전개와 결말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비슷한 결을 가진 와인을 고른다거나 '보는 맛'을 극대화시킬 것 같은 와인을 선택하는 데 진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이게 참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데, 또 다른 프로 혼술러 감자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걸 보면, 그리고 원스 어폰 어 와인 레터를 구독하고 꾸준히 읽어주신(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분들이 있는 걸 보면, 몰라서 그렇지 우리처럼 말하지 않아도 그 느낌적인 느낌이 뭔지 아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꽤 많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
|
|
영화 <와인을 딸 시간> 스틸컷. 고기를 구울 것인가, 와인을 딸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
|
|
원스 어폰 어 와인 레터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를 마지막 호에 와서야 다시 한 번 곱씹어보며 저는 꽤 경건한(?) 마음으로 일단 소고기 한 덩이를 구웠습니다. 그리고 선물 받아 아껴둔 와인과 함께 영화 <와인을 딸 시간(Uncorked)>을 시작했습니다. 영화 <와인을 딸 시간>은 제목부터 '경고(와인 없이 보지 말 것)'를 날리는 것 같지 않나요? 무언의 경고 속 ‘고기를 구울 것인가, 와인을 딸 것인가. 최고의 소믈리에를 꿈꾸는 청년.’이라는 짧은 소개글을 보고 저는 고기도 굽고 (그에 어울릴 만한) 와인도 따기로 했다는 TMI를 적어봅니다. 이날 선택한 와인은 프랑스 론 북부 지역에서 온 ‘샤푸티에 크로즈 에르미타쥬 구에 반’으로 시라 100% 와인인데요,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주인공 일라이자(마무두 아티)는 와인 숍에서 일하며 마스터 소믈리에를 꿈꾸는 청년입니다. 한때 소믈리에 존을 기웃거려본 자로서 보면, 마스터 소믈리에는 ‘하면 된다’는 다짐과 노력만으로는 거머쥐기 상당히 어려운 타이틀입니다. 전 세계에 마스터 소믈리에라는 타이틀을 가진 수가 고작 220여명에 불과하다는 숫자만 봐도 그렇죠. 그래서(?) 애초에 저는 꿈도 꾸지 못한 꿈이 바로 마스터 소믈리에입니다. 이 와인이 어느 지역에서 생산된 것인지 아주 작은 단위의 지역부터 품종, 심지어 빈티지까지 감별하는 타고난 능력은 물론 소믈리에로서 갖춰야 할 매너와 지식도 상당한데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비용도 만만치 않거든요.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 일라이자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바베큐 식당에서 일하며 틈틈이 와인 숍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다양한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와인 페어도 열심히 찾아다니며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못마땅해합니다. 일라이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가업을 잇길 바라거든요. 게다가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 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일라이자는 자신과의 싸움도 힘든데, 가족들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죠.
하지만 결국 그는 마스터 소믈리에 과정을 배우기 위해 그동안 모은 돈을 몽땅 털어 프랑스 와인 전문 학교를 등록했습니다. 일라이자는 누가 정해준 길이 아닌, 자신이 걷고 싶은 길을 선택한거예요. 파리에서 진지하게 그러나 행복한 표정으로 수업에 임하며 각종 와인을 테이스팅하는 일라이자를 보며 저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꿈(시험)을 핑계로 각종 와인을 맛보는 것도 부러웠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엄청난 행복이 느껴졌거든요. 이날 제가 딴 와인은 롯데 시그니엘에서도 모셔왔던 프렌치 파인 다이닝의 톱 스타 셰프, 야닉 알레노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리미티드 에디션 와인인데요. 저는 최고를 향해 달리는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에, 최고가 만든 이 와인을 딸 시간이 왔음을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
|
|
영화 <와인을 딸 시간> 스틸컷.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 행복하다 |
|
|
비록 원스 어폰 어 와인은 이번 호를 끝으로 막을 내리지만 저는 앞으로도 종종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마시고 싶은 와인을 마시며, 먹고 싶은 것을 먹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그게 저를 행복하게 만드는 시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저처럼, 감자님처럼 특별한 기준 없이 제멋대로 느낌대로 끼워 맞추는 페어링을 즐기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오늘은 바로 와인을 딸 시간입니다.
|
|
|
와인을 딸 시간(Uncorked)
개봉ㅣ2020, 미국
감독 | 프렌티스 페니
출연ㅣ마무두 아티, 코트니 B. 반스, 니시 내쉬
장르ㅣ드라마
한줄평ㅣ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넷플릭스 |
|
|
WRITTEN BY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 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
|
|
마지막 레터: 화이트의 계절에서 화이트의 계절로
From 감자 & 여니고니 |
|
|
💌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을 기억합니다. 평소 와인과 영화를 두고 혼술을 즐겨 하던 감자가 패턴도 결도 참 잘 맞는 전 직장 선배 여니고니를 꼬셔(!) 우리 뭐라도 기록해보는 게 어떠냐, 취기 어린 제안을 툭 건넸던 날을요.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시원하게 YES, 그렇게 원스 어폰 어 와인 첫 레터를 띄웠습니다. 두서도 없고 정신도 없었지만 우리가 보고 마신 기록들이 어딘가에 차곡차곡 모여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점에서, 어딘가 든든했던 계절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마지막 레터를 쓰고 있습니다. 왜 그만 두냐 물으신다면, 거창한 이유는 없고요. 퍽퍽한 회사 생활 중에 2주에 한 번 레터를 쓰는 일이 녹록치는 않았고, 간혹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황일 땐 답답하기도 했고, 맘에 100% 들지 않는 페어링을 놓고 글을 쓸 땐 약간의 죄책감이 들기도 했으며 등등. 말하자면 말이 길지만, 그냥 조금 지쳐서 쉬어 가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인 김에 그동안을 돌이켜보면, 와인과 영화야말로 지금껏 살면서 꾸준히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라는 걸, 레터를 써보내는 매 순간 깨닫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지 모르지만, 어디선가 원스 어폰 어 와인을 기다리고 응원해주고 계실 독자 여러분들을 향한 애정도 (모르시겠지만 혼자) 꽤 맹목적으로 부풀었고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뻔한 클리셰이건만, 그래도 이 구절만큼 지금을 잘 대변해주는 게 없는 것 같아 씁니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요. 레터는 더이상 보내지 않지만 감자와 여니고니는 앞으로도 바지런히 마시고 볼 테니까요. 그리고 간간이 원스 어폰 어 와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빼꼼 인사 드리겠습니다(인스타는 계속 열어두려 해요). 시작이 있어 끝이 있었던 것처럼 끝이 있기에 또 다른 시작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끝으로, 2024년 6월 원스 어폰 어 와인 첫 레터의 제목으로 이만 줄일게요. 바야흐로 화이트 와인의 계절입니다.
🌱
|
|
|
원스 어폰 어 와인 Once Upon a Wine
once_upon_a_wine@drinkingletter.com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