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 낭낭한 와인에 봄을 닮은 영화를.
Apr. 2025 l Vol. 21
봄이 왔는데 봄이 가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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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나라는 4월부터 11월까지 여름일 거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원래도 짧게만 느껴졌던 봄인데, 이젠 아예 통째로 사라질 위기라니요. 살살대는 봄바람, 기분 좋은 저녁 산책, 향긋한 봄나물, 그리고 꽃놀이. 이 모든 걸 이제 어쩌면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요즘입니다. 올해도 역시나 봄옷은 몇 번 입지도 못하고 옷장행이겠어요. 매달 월급처럼, 봄이 왔는데 봄이 갑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아직은(!) 주어진 이 봄을 최대한으로 만끽할 밖에요. 실시간으로 휘발 중인 소중한 계절을 붙잡고 어디 한 번 제대로 봄 같은 시간을 보내보자, 했습니다. 꽃 향이 낭낭한 와인에 봄을 닮은 영화, 지극히 원스 어폰 어 와인다운 봄맞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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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봄은 오는가
<원더> X 수카르디 세리에 에이 토론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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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명상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온 얼굴에 퍼진 온화한 빛과 평온 그 자체인 목소리로 그는 대뜸 저에게 이렇게 물었죠. “지금 당신의 계절은 무엇인가요?” 당시의 저는 어떠한 이유로 마음이 몹시 탁했던지라,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무거운 먹구름이 낀 겨울날 같아요”라고 답했습니다. 이럴 바엔 그냥 시원하게 한바탕 쏟아냈음 좋겠다고, 그렇게 춥고 어두운 비바람을 지나 결국엔 봄이 오면 좋겠다고요. 이렇듯 저에게 봄은 단순히 따수운 계절 그 이상을 넘어,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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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원더> 스틸컷. 어기,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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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봄’ 같은 영화로 저는 주저 없이 <원더>를 떠올렸습니다. 특별히 꽃이 많이 등장한다든가, 주인공 이름이 ‘스프링’이라든가 한 건 아니고요. 주인공 '어기'의 성장기가 마치 봄이 오는 과정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10살 어기는 선천성 안면 장애를 안고 태어나 남들과는 다른 외모로 살아갑니다. 따가운 시선에 외출 시 헬멧을 곧잘 쓰고 다니고, 또래 친구들처럼 학교에 가는 대신 홈스쿨링을 해왔죠. 그러다 부모님의 권유로 학교에 가게 되면서 어기의 도전과 시련은 시작됩니다. 친구들의 날 선 반응과 모욕적인 말들, 그럼에도 위트와 용기를 잃지 않는 어기는 어리지만 결코 어리지 않은, 단단한 영혼의 소유자죠. 수많은 상처 속에서도 자신만의 봉우리를 피우는 어기를 보고 있자면, 마치 오래 보아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들꽃을 보는 듯하달까요.
고로 와인은 꽃향이 낭낭한 ‘토론테스(Torrontés)’로 정했습니다. 좀 생소하실 수 있겠는데요. 아르헨티나의 화이트 품종인 토론테스는 비오니에, 게뷔르츠트라미너와 함께 가장 아로마가 강한 품종으로 꼽힙니다. <원더>에 곁들인 ‘수카르디 세리에 에이 토론테스’는 특히나 장미향이 지배적이었는데요. 리치, 시트러스 등의 과일향이 꽃향과 어우러져 향긋 상큼하면서도 바디가 꽤 묵직해 진중하게 다가왔습니다. 가끔은 쌉싸름하기도, 장미 가시처럼 톡 쏘기도 하지만 결국엔 그 모든 게 향기롭게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영화의 스토리와 잘 어울렸다는, 꿈보다 해몽 격인 평을 남기며 ‘수카르디 세리에 에이 토론테스'를 향한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의 평을 함께 덧붙입니다. 그는 이 와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죠. ‘꽤 향기롭지만 진지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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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봄입니다. 비록 몸둥이는 출퇴근길에 속절 없이 묶였지만, 길가에 핀 벚꽃을 보는 마음은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꽃놀이 생각으로 들뜬 걸 보니, 꽤나 우울하고 지리하게 지속되던 저의 겨울은 이젠 좀 지나갔나 싶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봄이 이리도 포근하니, 짧은 봄날이나마 조금이라도 더 깊게 이어지길 바랄 뿐이죠. 개나리, 목련, 벚꽃, 장미, 이름 모를 들꽃에게도 이 계절은 향기롭지만 진지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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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Wonder)
개봉ㅣ2017, 미국
장르 | 드라마
감독 | 스티븐 크보스키
출연ㅣ제이콥 트렘블레이(어기), 줄리아 로버츠(이자벨, 엄마), 오웬 윌슨(네이트, 아빠), 이자벨라 비도빅(비아, 누나)
한줄평ㅣ봄옷 그만 사제끼고 내면을 가꾸자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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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발 담그고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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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설레는 기분에👇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X 아델리나 아르네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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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말까지도 눈을 펑펑 쏟아내며 지독한 꽃샘추위를 부리던 겨울이 지나가고 드디어 봄이 왔습니다. 아, 이제 어디 가서 쨍한 봄햇살이나 맞으며 낮술하면 딱 좋겠구나 싶었던 요즘, 저는 마치 봄나물을 찾듯 아델리나 아르네이스(Adelina Arneis)를 떠올렸습니다. 몇 년 전 저를 아르네이스 품종에 눈을 뜨게 만든 와인인데 화사한 꽃향기에 감귤, 자몽, 레몬과 같은 시트러스, 복숭아, 살구 같은 과실향이 달콤상큼한 것이 뭐랄까, 생기 넘치는 꽃다발을 마시는 것 같거든요. 형형색색의 나비와 갖가지 이름 모를 꽃들이 모여 있는 라벨에서도 화창한 봄의 기운이 솔솔 풍깁니다.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던 꽃망울이 하나둘 터지는 이 계절, 왠지 모르게 뭔가 시작될 것 같은 설레는 이 기분. 한낮의 기온이 20도에 다다랐던 지난 주말, 저는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와 함께 꽃다발 같은 와인을 마시며 봄을 맞이하는 기분을 좀 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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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스틸컷.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재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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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막차였습니다. 어느 지하철 역 앞, 무기(스다 마사키)와 키누(아리무라 카스미)는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칩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의 택시비는 (게다가 막차가 끊긴 심야라면 더욱) 살벌하고, 무기와 키누는 한푼이 아쉬운 스물한 살 대학생입니다. 대신 첫차가 다니는 새벽까지 어디서든 대충 시간을 떼울 수 있는 체력이 있죠. 어색한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선술집에서 하이볼을 마시며 첫차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웬걸, 좋아하는 영화부터 책, 전시회 심지어 똑같은 신발을 신은 것까지 그야말로 영화처럼 소울 메이트가 (영화처럼) 눈앞에 나타난 거예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알콩달콩 스물한 살다운 연애를 시작하는데, 솔직히 여기까진 30대인 저에게 이젠 좀 오글오글 유치한거 아닌가 싶은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거를 결심한 두 사람이 함께 좋아하는 것으로 하나둘 집을 채워가며 함께 보내는 모습을 보며 어느새 제 얼굴에는 미소가 실실 새어나옵니다. 그리고 저는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 30분 넘게 걸리는 길을 재잘재잘 떠들며 (한 손에는 무심하게 꽃다발을 들고) 걷는 장면과 집 근처에 기가 막히게 맛있는 야키소바 빵을 파는 빵집을 찾고는 기뻐하는 장면을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으로 꼽습니다.
조금 느려도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키누, 이상보다 현실에 순응하는 쪽을 택한 무기. 완벽하게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던 두 사람 사이에는 시간이 흐를 수록 작은 균열이 하나둘 생기며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만들고 두 사람의 대화를 단절시키고 말죠. 함께 살을 맞대며 보낸 4년 연애가 무너지는 모습은 너무나 치밀할 정도로 현실적이라 먹먹합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끝나는 영화 제목은 처음부터 결말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네 덕분에 내 20대의 한 구석이 참 예쁘고 따뜻했다고, 앞으로도 너의 행복을 응원한다는 키누와 무기의 이별은 처음 고백했던 날만큼이나 눈부셨습니다. 끝까지 차분하게 화사하고 우아함을 잃지 않는 아르네이스 와인처럼요. 돌아보면 (곱게) 잘 헤어져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축복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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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스틸컷. 우리가 어쩌다, 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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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좀 뻔하고 유치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돌려보곤 어쩐지 현실적인 결말에 마음이 조금 싱숭생숭해졌습니다. 그리고 문득 꽃다발 같은 사랑은 뭘까, 생각해봅니다. 언젠가 시들거라는 걸 알면서도 집에 들이는 꽃처럼, 언젠가 사그라들 걸 알면서도 아름다운 그 순간에 매료되어 기어코 시작하고야 마는 게 꽃다발 같은 사랑일까요? 봄이니까, 라며 특별한 이유 없이 프리지아 한 다발을 내미는 남자친구를 보며 그렇다면 저는 이제 꽃다발 같은 사랑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변하지 않는 소나무 같은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꽃다발 같은 아르네이스 와인은 늘 곁에 두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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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개봉ㅣ2021, 일본
감독 | 도이 노부히로
출연ㅣ아리무라 카스미(키누), 스다 마사키(무기)
장르ㅣ멜로/로맨스
한줄평ㅣ가장 이상적인 첫사랑과 가장 이상적인 이별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네이버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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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 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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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콘텐츠, 마신 와인, 그외 발견한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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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데일리 와인이 저에게 왔습니다. 가격, 맛, 구매 접근성까지 데일리 와인의 삼박자를 갖춘 뉴질랜드 말보로 소비뇽 블랑인데요. 배우 하정우씨(요즘 자주 등장)가 사랑하는 데일리 와인으로도 알려진 와인을 뒤늦게 마셔보곤 '이거 왜 이제야 알았지?' 땅을 치고 후회를 했다니까요? 레몬과 같은 시트러스류의 향이 먼저 올라오다가 복숭아, 사과, 파인애플 등 산도와 당도를 가진 과일향이 이어집니다. 소비뇽 블랑다운 풀내음은 은은한 편이고요, 미끈미끈한 질감에 짭조름한 미네랄이 기분 좋게 넘어가는 와인입니다. 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은 것이, 하, 저는 아무래도 이렇게 파 로드 소비뇽 블랑에 스며들 것 같습니다. 이 와인, 안 마셔본 사람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합니다. 데일리샷과 이마트, 와인앤모어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 뉴질랜드, 말보로 🍇 소비뇽 블랑 💲 1만원대
제가 일본 여행에서 빼놓지 않고 사오는 것은 바로 산토리 위스키입니다. 산토리는 일본에서 양질의 위스키를 생산하는 증류소인데요, 저는 가쿠빈과 올드 위스키를 1병씩 꼭 챙겨옵니다. 바닐라와 꿀, 계피향이 피어오르는 달달한 가쿠빈은 하이볼용, 참나무향이 짙에 깔린 묵직한 올드 위스키는 온더락용이니 분명 둘의 용도는 다르고 둘 다 필요한 거죠. 게다가 현지에서는 2천엔 초반대로 진짜 말도 안 되는 가성비인데, 한국에 오면 5~6만원대로 몸값이 훌쩍 뛰거든요. 짭조름한 초콜릿이랑 먹으면 미친 퍼포먼스를 보이는 탓에 한 잔으로 끝내는 날이 드뭅니다. 일본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어 지난 달 일본 여행에서도 빼먹지 않고 챙겨왔고요, 일본 여행을 간다는 주변 지인들에게도 꼭 구매 대행을 부탁하는 위스키라는 것을 한 번 더 어필해봅니다.
🇯🇵 일본 🍇 블랜디드 위스키 💲 2만원대(일본 현지 가격)
한동안 ‘토론테스’에 빠졌던 저입니다. 봄을 타는 것인지 뭔지, 은은하게 풍기는 그 꽃향에 매료되어 와인 코너에 만 가면 어김없이 토론테스를 찾곤 했는데요. 테라자스 리저브 토론테스는 그중 가성비가 매우 훌륭했던 라벨입니다. 먹어본 적은 없지만 안개꽃을 먹으면 이런 맛이 날까 싶은 포근한 느낌, 여기에 어릴 때 봉지채 까먹던 복숭아 알사탕 향이 사악 스쳐가는 것이 색깔로 치면 흰색, 분홍색, 살구색 등의 파스텔 톤의 와인입니다. 음식에 곁들여도 좋지만, 간단한 안줏거리만을 곁들여 와인 자체의 섬세한 맛과 향에 집중하는 게 개인적으로 더 좋더라고요. 이 봄이 가기 전에, 몇 병 더 쟁일 생각입니다.
🇦🇷 아르헨티나, 살타 🍇 토론테스 💲1만원대 후반
📖 마중도 배웅도 없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박준 시인의 신간이 나왔습니다. 무조건적 반사 반응으로 ‘친필 사인 한정판’을 주문해두고 명절날 새 옷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마구 설렜더랬죠. 시집이 집에 도착한 후, 한 장 한 장 책장이 넘어가는 게 아쉬워 조금씩 며칠째 나눠 먹는 중입니다. 그의 오랜 팬으로서, 박준 시인은 슬픔을 들추어 다루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쓸쓸하고 슬픈 감정을 감추는 대신 보이는 곳에 아주 슬며시 꺼내어 놓고는 그 감정들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어르고 달랠 줄 아는. 그렇게 슬펐던 감정은 결국엔 따스한 온기로 덮이고, 그 온기는 오래도록 남아 이내 위로로 다가옵니다. 벌써 시집의 반 정도를 호로록 읽어버리고 만 저는 남은 문장들은 와인과 함께해보리, 벼르고 있는데요. 시의 맛이 너무도 다양해서 뭐가 어울릴지 가늠이 잘 되진 않지만, 우선은 마중도 배웅도 없이 리슬링부터 시작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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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와인 Once Upon a Wine
once_upon_a_wine@drinkinglet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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