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사랑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Mar. 2025 l Vol. 19
그 시절, 우리들의 노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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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회사에서, 팀에 새롭게 합류한 동료와 얘기를 나누다 우리가 같은 감독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데면데면하고 어색하던 공기에 친밀감이 와락 더해졌죠. 그러고 보면 어떤 감독이나 작가를 동시에 좋아한다는 것은 꽤 강한 결속력을 갖고 있는 듯한데, 그것은 아마도 서로가 서로를 직감적으로 알아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당신도 나와 같은 결이구나’ 하고.
동료 에디터 여니고니님과 저 또한 그런 사이입니다. 성향은 매우 다른데(여니고니님은 저와 같은 MBTI라 자주 주장하지만…)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작가를 여럿 공유하고 있고,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오랜 시간 공백과 지루함 없이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 문장, 그때 그 장면, 그때 그 대사. 서로가 서로에게 인상적이었던 곳들을 사이 좋게 긁어주다 보면 그것만큼 날쌘 시간 도둑이 또 없죠.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번 레터 주제를 정하면서 둘 사이 벌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다름아닌 우리가 참 좋아하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다시 돌려보기로 했거든요. 언제나 그랬듯, 와인은 옵션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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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맛의 미네랄리티
<우리들의 블루스> X 에라주리즈 맥스 샤르도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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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쯤 한 번 질펀하게 울 때가 되었나 보다, 싶었습니다. 원스 어폰 어 와인, 이번 호에선 우리가 너무도 좋아해 마지않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다뤄보자, 여니고니와 이야기했을 때부터 저는 단 하나의 후보군으로 <우리들의 블루스>를 떠올렸으니까요. 이 드라마는 저의 틀림없는 울음벨입니다. 눈이 팅팅 부을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가끔 이 드라마를 보고 싶은 심정은 무엇일까요. 가슴을 송송 찌르는 대사들과 대체 불가한 배우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를 대자면 참 여럿이겠으나, 아주 사적으로 저는 이 드라마를 이용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울고 싶은데 울 만한 이유를 딱히 찾지 못했을 때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이 날은 조금 울적한데 울 일은 딱히 없고 그렇지만 분명 울고 싶었던 날이었습니다. 나름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들의 블루스>에 곁들일 만한 와인을 궁리했습니다. 우선은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제주도가 떠올랐습니다. 제주의 바닷바람처럼 짭쪼름한 미네랄리티가 있으면 했고, 여기에 감귤처럼 상큼한 시트러스향이 감돌았으면 더 좋겠다, 싶었죠. 여기까지가 제가 자주 가는 와인숍 사장님께 설명한 내용이고(왕왕 이렇게 추천을 부탁드리는데 신기하게도 이걸 또 찰떡같이 알아들으십니다), 그렇게 아르헨티나산 ‘에라주리즈 맥스 샤르도네(Errazuriz Max Chardonnay)’가 당첨되었습니다. 시트러스향에 약간의 미네랄, 그에 더한 은은한 오크향과 캐모마일, 아카시아 꽃향까지. 다양한 레이어가 층층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와인은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로 켜켜이 쌓아올려진 옴니버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여러모로 닮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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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계모 같은 친모를 향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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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에피소드들 중 사실 저를 울리는 에피소드는 정해져 있어, 바로 본론으로 직행했습니다. 옥동(김혜자)과 동석(이병헌)의 이야기입니다. 남편과의 사별 후 아들 동석을 데리고 재혼한 옥동은 퍽퍽한 현실에 동석에게 한없이 모질게 대했고, 그 세월을 되갚아주기라도 한 듯 동석은 나이가 들어서도 엄마를 본 체 만 체 외면하며 상처의 말만을 내뱉죠. 그러다 옥동이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동석은 엄마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 둘이 여행을 떠납니다. 아는 맛 못지않게 아는 감정도 무섭습니다. 옥동과 동석의 서글픈 결말을 두고 저는 어김없이 또 한 번,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간만에 대차게 울음을 터뜨린 저는 눈물의 맛인지 와인의 미네랄리티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모를 짠내와 함께 한참을 끄억거렸는데 한 편으론 시트러스처럼 톡 쏘는 시원한 기분이 들었습니다(이 또한 와인 바, 울음 반). 바로, 이거죠. 가끔 딱히 이유 없이 울어제끼는 맛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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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꽃 필 때 다시 오자, 엄마랑 나랑 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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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여전히 이날 왜 울고 싶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건 한바탕 울고 나니 울고 싶었다던 그 어떤 이유도 정작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몰라, 그냥 뭐가 맘에 좀 안 들었나보지’라며 이쯤에서 퉁치고 후련하게 비워진 이 상태를 그냥 만끽하기로요. 그리고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다음에 또 울적한 날을 위해 저의 또 다른 울음벨인 영옥(한지민)과 영희(정은혜)의 에피소드는 아껴두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때 또 다시 같은 와인, ‘에라주리즈 맥스 샤르도네'를 따겠노라 싶은데, 그땐 꽃향이 더 강하게 풍기리라 기대합니다. 이상, 팅팅 부은 눈으로 울보 감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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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
개봉ㅣ2022, 한국
장르 | 드라마
연출 | 김규태, 김양희, 이정묵
극본ㅣ노희경, 강정미, 김시영, 김성민, 현리나
출연ㅣ이병헌(동석), 김혜자(옥동), 한지민(영옥), 신민아(선아), 이정은(은희), 김우빈(정준), 고두심(춘희) 등
한줄평ㅣ쓰고 달고 서글프면서도 단 맛의, 인생 종합선물세트 같은 옴니버스 드라마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넷플릭스 |
에라주리즈 맥스 샤르도네
(Errazuriz Max Chardonnay)
산지ㅣ칠레, 아콩카구아 밸리(Aconcagua Valley)
품종ㅣ샤르도네
도수ㅣ13%
특징ㅣ감귤류의 시트러스, 살짝의 오크 터치, 약간의 미네랄, 아주 가볍지만은 않은 바디감, 캐모마일 티와 같은 은은한 꽃향까지
가격ㅣ2만원대 후반
한줄평ㅣ이 가격대에서 정말이지 찾기 힘든 여러 겹의 레이어, 육각형에 가까운 샤르도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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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감자
2말3초를 여행매거진 에디터로 살았고, 지금은 어쩌다 IT 업계에 발 담그고 있습니다. 일단 좋아하면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으로 보는 습성이 있는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죠. 거북이, 돌고래, 초록 정원에 차려진 와인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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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도 굿나잇
<괜찮아, 사랑이야> X 비고르 산지오베제 메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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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러분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거나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매일 아침 만원 지옥철? 밥 한끼도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직장 동료(나 상사)와의 프로젝트? 이제 정말 못 봐주겠다 싶을 정도로 늘어진 뱃살? 진짜 웬만하면 살면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바선생? 저는 이런 것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최근 무시무시한 불면증을 겪었거든요. 인간의 3대 욕구 중 (아마도) 가장 최상위에는 수면욕이 자리하는데요. 그 욕구를 몇 날 며칠 충족하지 못하니 정말 괴롭다 못해 미쳐 돌아버릴 것 같다는 말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앞으로 계속 이렇게 잠을 못자면 어떡하지? 살면서 이렇게 공포스러웠던 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3일간 수면 시간 총 4시간. 밤새 애타게 찾은 양만 수천, 아니 수만마리는 되는 것 같고,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바디스캔 명상을 5시간 넘게 해도, 따뜻한 물에 족욕을 하고 멜라토닌을 삼켜도 소용 없었습니다. 저는 정말 격렬하게 자고 싶은데 오만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부유하며 잠이 들랑말랑하는 매순간 저를 괴롭혔죠. 아무리 간절히 잠을 청해도 뜻대로 되지 않던 나날들,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었던 무의식이 저를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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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스틸컷. 의학 드라마가 분명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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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 장르가 로맨스 코미디인 것은 확실한데 저는 여기에 의학이 빠진 것이 아직도 의아합니다. 해수(공효진)는 대학병원 정신과 전문의지만 어릴 적 엄마의 불륜을 목격한 이후 이성과의 신체 접촉을 더럽게 느끼는 관계기피증을 갖고 있고, 수려한 외모에 글까지 잘 쓰는 스타 작가 재열(조인성)은 가정폭력의 트라우마에 스키조(정신분열증)를 앓고 있습니다. 해수의 하우스 메이트 수광(이광수)은 오랫동안 투렛 증후군(틱장애)으로 힘들어하고요. 저도 몰랐던 사실인데, 언행이 심하게 거친 경우를 두고 품행장애라고 하더군요? 재열의 형인 재범과 수광의 여자친구 소녀(이름입니다)가 바로 품행장애를 가진 주변인물입니다. 그밖에도 해리 장애(고통스러운 경험이나 심각한 스트레스로 기억을 잃는 장애), 자주 몸에 벌레가 기어다닌다는 망상이나 상상 임신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부터 우울증과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수면장애와 같은 비교적 흔한(?) 병을 가진 환자들이 병원을 찾고요. 해수를 비롯한 정신과 의사들은 그런 환자들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들어주고 하나하나 그 원인을 찾아갑니다. 마음의 병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아픈지도 모른채 방치하거나 알면서도 외면하는 (최악의)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은 정신이 몸을 지배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마음이 좀 아플 때, 스스로 혹은 주변인의 도움으로 일단 병원을 찾았다면 절반은 성공입니다.
저 역시 난생 처음으로 겪은 수면장애로 음주 대신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찾았습니다. 며칠 잠 좀 못 잤다고 병원까지?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이대로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저는 며칠 간의 증상들을 울먹이며 고백하듯 이야기하고 신경안정제를 처방 받았습니다. 수면 유도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마음을 좀 편안하게 해준다는 약이라는데, 세상에 그런 약이 있었다니. “잠 못자고 식사 못하는 걸로 어떻게 정신과에 들를 생각을 하셨어요? 생각이 되게 진보적이시네요?” 뒤늦게 드라마 속 의사 해수의 칭찬에 내심 뿌듯해하며 저는 빠르게 병원을 다녀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약의 효과인지, 상담의 효과인지, 며칠 간 드라마를 정주행하며 마음을 돌보는 것보다 우선시 해야할 것은 없다는 걸 느끼게 되어서인지, 아무튼지 간에 저는 다시 서서히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됐거든요. 비로소 멍했던 머리는 맑아지고, 메스꺼움 대신 식욕이 돋는 것이 여러분, 잠 못 자고 밥 못 먹는 그거, 아픈 거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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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스틸컷. 그저 토닥여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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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없이도 숙면할 수 있게 된 이후 저는 기쁜 마음으로 오랜만에 (사실 술은 숙면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만) 와인숍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전에 가볍게 한두 잔 마실 수 있을 만한 부드러운 레드 와인을 추천 받았는데요, 바로 비고르(Vigor) 산지오베제 메를로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산지오베제와 메를로를 블랜딩한 와인이죠. 오픈 초기에는 다소 알콜향이 도드라지고 뾰족한 느낌이 강한 것이 며칠 전 예민했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새콤한 산딸기, 자두, 체리와 같은 붉은 과실향이 폭발하면서도 부드럽고 차분한 품위를 가진 와인이더군요. 비고르(Vigor)는 ‘힘’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와인 (딱) 한잔씩을 오랫동안 음미하며 갖가지 마음의 병을 갖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병원을 찾고, 따뜻한 치료를 받으며 다시 건강해지는 스토리를 마저 주행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감기가 찾아온다면, 면역력이 너무 약한 상태라 혼자서는 극복할 수 없다면, 주저 없이 병원을 찾으시면 좋겠습니다. 가까운 주변에 마음을 치료하는 병원이 이비인후과보다 많아 놀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재열의 말마따나 자주, 종종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오늘 하루는 괜찮았는지 안부를 물어봐주고 따뜻한 굿나잇 인사를 전하면 좋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오늘 밤도 모두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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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사랑이야
개봉ㅣ2014, 한국
연출 | 김규태
극본 | 노희경
출연ㅣ조인성(장재열), 공효진(지해수), 성동일(조동민), 이광수(박수광), 도경수(한강우)
장르ㅣ로맨스 코미디
한줄평ㅣ희경 언니가 말한다, 마음을 돌보는 데 인색하지 말자
포스터 이미지 출처ㅣS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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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여니고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경험주의자.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한두번 경험으로도 쉽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가장 끈기 있게 해온 것은 한 회사에서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와인을 좋아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혼술로 충전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갖습니다. 맛있는 와인을 발견하면 한때 직장 동료였던 감자가 자주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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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콘텐츠, 마신 와인, 그외 발견한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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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박봉담씨! 하고 불러야할 것 같죠? 사람 이름 같지만 사람 이름은 아니고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위치한 카페이자, 양조장이자, 보틀샵입니다. 3월1일 그랜드 오픈한 따끈따끈한 곳이죠. 이곳은 1986년 국순당에서 만든 세 번째 양조장인데요. 오랜 시간의 흔적이 가득한 양조장이 새로운 식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한쪽에선 스마트 팜에서 직접 재배한 신선한 채소를 사용해 건강한 한끼 식사와 음료를 만들고, 또 한쪽에선 여전히 술을 빚습니다. 그리고 또 한쪽에선 술을 팔고요. 갓 만든 생막걸리가 맛있는 건 다 아시죠? 1,400원의 행복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막걸리보다 와인이 더 많은거 있죠? 저렴한 데일리 와인부터 고가의 프리미엄 와인까지 라인업이 생각보다 탄탄해 놀랐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막걸리로 만든 쫀득한 술빵을 잊을 수가 없네요.
📍 경기 화성시 봉담읍 매송고색로 452
마츠 엘 시리즈 와인은 여러분도 한 번쯤 본 적 있는 와인일 거예요. 청년, 중년, 노인 남성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라벨에 박혀 있는 와인인데요. 각각 피카로, 레시오, 비에호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이들은 와인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들로 농부에 대한 존경과 함께 와인의 숙성 시간을 암시합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중년 남성의 얼굴이 있는 레시오 와인을 좋아하는데요. 오랜만에 만난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 나눴습니다. 약 14개월의 숙성을 거쳐 완성된 템프라니요 와인은 피카로(3개월 숙성)보다 확실히 중간 이상의 묵직하고 짙은 과일향을 품고 있습니다. 은은한 초콜릿과 바닐라향에, 뭐든 다 품어줄 것 같은 부드럽고 인자한 느낌이랄까요. 호불호 없이 모두 소고기와 함께 흡족한 저녁을 보냈고요. 이 퀄리티에 2만원대의 가격이 감사할 뿐입니다.
🇪🇸 스페인, 토로 🍇 템프라니요 💲 2만원대
경험상 말할 수 있는 것은, 레드 와인이라고 모두 소고기와의 궁합이 좋지는 않습니다. 오크향이 너무 강해서 고기의 풍미를 가리기도 하고, 와인 고유의 캐릭터가 너무 미미해서 되려 소고기의 풍미에 와인이 압도되어버리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특히 비싼) 소고기를 먹을 때면 함께 마시는 와인을 고르는 데 꽤 심혈을 기울이는 편인데요. 칠레산 ‘시데랄’은 그런 점에서 믿고 마시는 소고기 페어링 와인입니다. 소위 ‘보르도 블렌딩’이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까베르네 소비뇽, 까베르네 피랑, 까르미네르, 시라 등 여러 품종을 블렌딩한 결과 검붉은 과일향이 아주 진하고 묵직하게 올라옵니다. 간만에 맛깔나게 구워낸 한우에 시데랄을 곁들였던 지난 주말의 저를 지금 이 글을 쓰는 현재의 제가 몹시 부러워하는 중입니다. 깨어나는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니 최소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브리딩을 꼭 거쳐 드시길 권합니다.
🇨🇱 칠레, 카차포알 밸리 🍇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등 블렌딩 💲세일가로 3만원대
🥂 리마페레 소비뇽 블랑 (Rimapere Sauvignon Blanc)
원스 어폰 어 와인 레터를 지금껏 내리받아 보고 계신 독자분이 계시다면, 제가 지금껏 얼마나 ‘소비뇽 블랑’을 많이 언급(그리고 찬양)했는지 아실 거예요.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저는 그러니까 소비뇽 블랑 처돌이, 그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그러하시듯) 뉴질랜드 말보로산을 가장 애정하는데요. 다 비슷비슷하고 그 와인이 그 와인인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다른 걸 마셔보고 싶고 또 탐구하고 싶은 맘은 여전합니다. 얼마 전에 마신 '리마페레 소비뇽 블랑' 역시, 한마디로 말보로 소비뇽 블랑의 정석에 가까운 와인이었는데요. 풋풋한 풀 내음 그리고 시트러스, 레몬, 잘 익은 열대과실 향이 밀당 없이 돌직구로 다가왔죠. 이런 저의 예상 범위에 있는(그래서 늘 좋은) 소비뇽 블랑을 마실 때마다 어떤 음식까지 이 아이가 감당할 수 있나, 페어링 실험해보곤 하는 저의 이번 도전 메뉴는 좀 색다르게 태국 음식이었습니다. 매콤하게 톡 쏘는 쏨땀에 기름지면서도 부드러운 팟타이, 그 어떤 음식에도 능구렁이처럼 유들유들 잘 어울리더군요. 음, 다음 번엔 꿔바로우에도 한 번 도전해볼 참입니다. 이래서 제가 이 아이를 못 끊습니다.
🇳🇿 뉴질랜드, 말보로 🍇 소비뇽 블랑 💲2만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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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와인 Once Upon a Wine
once_upon_a_wine@drinkinglet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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